1492년은 보통 "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도착한 해"로 기억돼요. 그런데 같은 해 스페인에서는 역사의 방향을 바꾼 사건이 두 가지 더 있었어요. 세 사건은 몇 달 간격으로 일어났고, 모두 같은 왕과 여왕의 손을 거쳤어요.
| 1월 2일 | 그라나다 함락 · 이베리아반도의 마지막 이슬람 왕국이 항복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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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31일 | 알람브라 칙령 · 유대인에게 "개종하거나, 7월 말까지 떠나라"는 명령이 내려져요. |
| 8월 3일 | 콜럼버스 출항 · 추방 마감 직후, 세 척의 배가 팔로스 항구를 떠나요. |
콜럼버스는 항해일지 첫머리에 그라나다의 함락과 유대인 추방을 차례로 적은 뒤, 바로 이어서 자신의 항해 이야기를 시작해요. 당시 사람들 눈에도 이 세 가지는 따로 떨어진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흐름이었다는 뜻이에요. 이 글은 그 흐름을 돈의 눈으로 따라가 봅니다.
1월 2일, 780년 만의 끝
711년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세력이 이베리아반도에 들어온 뒤, 북쪽의 기독교 왕국들은 수백 년에 걸쳐 영토를 되찾아 왔어요. 이것을 레콩키스타(국토 회복 운동)라고 불러요. 마지막까지 남은 곳이 남쪽의 그라나다 왕국이었고, 1492년 1월 2일 무함마드 12세(보압딜)가 알람브라 궁전의 열쇠를 넘기면서 약 780년의 역사가 막을 내려요.
승리의 주인공은 '가톨릭 공동왕'이라 불린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 부부였어요. 그런데 10년 가까이 이어진 그라나다 전쟁은 엄청난 돈을 삼켰어요. 왕실은 전쟁이 끝난 순간에도 빚과 텅 빈 금고를 안고 있었어요. 이 사실을 기억해 두면 뒤의 두 사건이 더 잘 보여요.
3월 31일, '하나의 신앙'을 위한 추방
그라나다를 함락한 지 석 달 뒤, 두 왕은 바로 그 알람브라 궁전에서 유대인 추방령에 서명해요. 세례를 받고 기독교로 개종하든지, 7월 말까지 모든 재산을 정리하고 나라를 떠나라는 내용이었어요. 금과 은, 화폐는 가지고 나갈 수 없었어요.
표면적인 이유는 종교였어요. 이미 1478년부터 종교재판소가 활동하고 있었고, 왕실은 개종한 유대인(콘베르소)이 몰래 옛 신앙을 지킨다고 의심했어요. 이슬람 왕국을 무너뜨린 직후였기에 '하나의 왕국, 하나의 신앙'이라는 목표가 더 강하게 밀어붙여졌어요.
떠난 사람의 수는 학자마다 추정이 크게 달라요. 적게는 수만 명, 많게는 10만 명 이상으로 보고, 그보다 많은 사람이 남기 위해 개종을 택했어요. 떠난 이들 중에는 왕실 재정을 맡았던 이삭 아브라바넬도 있었어요. 그는 왕을 찾아가 칙령을 거둬 달라고 호소했지만 실패했고, 결국 이탈리아 나폴리로 떠났어요. 많은 사람이 포르투갈, 북아프리카, 그리고 이들을 받아들인 오스만제국으로 흩어졌어요.
8월 3일, 여왕의 보석은 팔리지 않았다
콜럼버스는 서쪽으로 가면 아시아에 닿는다며 여러 해 동안 포르투갈과 스페인 왕실을 설득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했어요. 그런데 그라나다 함락 직후인 4월 17일, 마침내 계약(산타페 협약)이 맺어져요. 새로 발견하는 땅의 총독 자리와 그곳에서 나오는 수익의 10분의 1을 받는다는 조건이었어요.
흔히 "이사벨 여왕이 보석을 팔아 항해 자금을 댔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건 나중에 생긴 이야기예요. 실제로 돈을 마련한 사람은 페르난도 왕의 재무 관리였던 루이스 데 산탄헬이에요. 그는 개종한 유대인 가문 출신이었어요. 산탄헬은 자신이 관리하던 치안 기구(산타 에르만다드)의 자금에서 약 114만 마라베디를 빌려 왔어요. 콜럼버스 자신도 이탈리아 상인들에게 돈을 빌려 일부를 보탰고, 팔로스 마을은 왕실에 진 벌금 대신 배 두 척을 내놓았어요.
정리하면, 콜럼버스의 항해는 여왕의 보석이 아니라 빌린 돈으로 떠났어요. 그리고 그 돈을 마련한 사람은, 같은 해 추방령을 겨우 피한 개종자 가문 출신이었어요.
은이 쏟아지기 시작하다
콜럼버스가 찾던 아시아 대신 발견한 땅은 스페인에 상상하지 못한 부를 안겨 줘요. 1545년 지금의 볼리비아에서 포토시 은광이, 이듬해 멕시코에서 사카테카스 은광이 발견되면서 엄청난 양의 은이 대서양을 건너오기 시작해요. 16세기 후반 스페인은 세계에서 은을 가장 많이 가진 나라였어요.
그런데 돈이 많아지자 이상한 일이 생겨요. 물건의 양은 그대로인데 은화만 늘어나니 물가가 오르기 시작한 거예요. 한 고전적인 연구는 16세기 동안 스페인 물가가 약 4배 올랐다고 계산했어요. 이 현상을 가격혁명이라고 불러요. 돈의 양이 늘면 돈의 가치가 떨어진다는, 오늘날 인플레이션 논쟁의 출발점이 된 사건이에요.
은을 가장 많이 가진 나라의 파산
더 놀라운 일은 그다음이에요. 은이 가장 많이 들어오던 펠리페 2세 시대에 스페인 왕실은 네 번이나 지급 불능을 선언했어요(1557, 1560, 1575, 1596년). 네덜란드 독립 전쟁, 오스만제국과의 해전, 영국 원정 같은 끝없는 전쟁 비용이 들어오는 은보다 빨리 나갔기 때문이에요.
왕실은 모자란 돈을 외국 은행가들에게 빌렸어요. 처음에는 독일의 푸거 가문이, 1557년 이후에는 제노바 은행가들이 스페인 왕실의 돈줄을 쥐었어요. 아메리카의 은은 세비야 항구에 내리자마자 빚을 갚느라 제노바와 안트베르펜으로 빠져나갔어요. 스페인은 은의 통로였지, 은이 쌓이는 곳이 아니었던 셈이에요.
다만 최근 연구는 이 파산들을 조금 다르게 봐요. 펠리페 2세의 부도는 나라가 무너진 사건이라기보다 은행가들과 미리 예상한 범위 안에서 빚 조건을 다시 협상한 것에 가까웠고, 은행가들도 전체적으로는 이익을 봤다는 분석이에요. 그래도 분명한 사실은 남아요. 스페인은 은을 손에 넣었지만, 그 은을 굴리는 금융의 기술은 다른 나라 사람들의 손에 있었다는 점이에요.
1492년이 남긴 질문
스페인은 1492년에 신대륙으로 가는 문을 열었고, 같은 해 오랫동안 왕실 재정과 상업에 관여해 온 사람들 일부를 내보냈어요. 이슬람교도에 대한 압박도 이어져 1502년에는 개종 강요가, 1609년부터는 개종한 이슬람교도(모리스코)의 추방이 뒤따랐어요.
이 추방들이 스페인의 쇠퇴에 얼마나 큰 영향을 줬는지는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논쟁 중이에요. 끝없는 전쟁, 은에 기대어 산업을 키우지 못한 경제 구조, 무거운 세금 등 다른 원인도 많았어요. 그래서 "누구를 쫓아내서 망했다"는 식의 한 줄 설명은 정확하지 않아요. 다만 돈이 많다는 것과 돈을 다룰 줄 안다는 것은 다르다는 교훈만큼은 1492년 이후의 스페인이 분명하게 보여 줘요.
은도 금광도 없던 작은 나라 네덜란드는 1609년 암스테르담 은행을 세우고 거래소와 주식회사를 키우며 17세기 세계 무역의 중심이 돼요. 다음 이야기는 청어 한 마리에서 시작된 그 나라, 암스테르담으로 이어집니다.
더 읽을거리
- Henry Kamen, The Spanish Inquisition: A Historical Revision (Yale University Press)
- Earl J. Hamilton, American Treasure and the Price Revolution in Spain, 1501–1650 (1934)
- Mauricio Drelichman & Hans-Joachim Voth, Lending to the Borrower from Hell: Debt, Taxes, and Default in the Age of Philip II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4)
- 콜럼버스 항해일지 (라스 카사스 요약본)